선동렬 VS 최동원 누가 더 레전드?
선동렬: 제구의 달인, 호남의 자부심
탄생과 성장 배경
1963년생인 선동렬은 광주일고 야구부에서 투수로 활약하며 대학 진학 없이 곧바로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했다. 고교 시절 그는 130km 초반대의 직구에 날카로운 슬라이더를 더해 호남권 고교 선수들 사이에서 ‘유망주’로 손꼽혔다.
해태 타이거즈 시절 입단 초기
1985년 프로에 데뷔한 선동렬은 첫 시즌부터 신인왕급 활약을 펼쳤다. 중간 계투로 등판해 안정된 제구력으로 승리를 지키는 모습이 돋보였고, 이듬해부터 선발 자원으로 본격 성장하기 시작했다.
전성기 돌입: 4관왕 시즌들
선동렬의 커리어 하이라이트는 1991~1992년 두 시즌에 걸친 투수 4관왕(다승·탈삼진·평균자책점·승률)과, 1994년 재차 4관왕 타이틀을 거머쥔 기록이다. 이 기간 그는 매해 200이닝이 넘는 이닝 소화와 함께 15승 이상을 꾸준히 쌓았고, 1992년에는 16승 5패, 평균자책점 1.96으로 리그 정상에 우뚝 섰다.
정교한 제구와 다채로운 변화구
선동렬은 직구 속도가 140km대 초중반에 머물렀지만, 스트라이크존 중심을 정확히 찌르는 놀라운 제구력을 가졌다. 그의 슬라이더는 우타자 몸쪽에서 빠르게 꺾여 들어갔고, 체인지업은 타자의 타이밍을 무너뜨렸다. 투구 레퍼토리는 직구·슬라이더·체인지업 외에도 싱커·커터를 섞어 쓰면서, 한 타석 안에서도 세 종류 이상의 구종을 구사하는 유연함을 보였다.
왕조 해태의 중추, 시리즈 제패 견인
선동렬은 해태 타이거즈가 1986년부터 1993년까지 한국시리즈 5회 우승을 달성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특히 1991년 시리즈에서는 2차전과 5차전에 선발 등판해 두 번 모두 승리투수가 되며 ‘클러치 투수’로서의 면모를 확인시켜 주었다.
은퇴 후 국제 무대 지도자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야구 대표팀 감독으로 선동렬이 선임되자, 그는 제구 위주 전술과 젊은 투수단 관리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어 2009년 WBC에서는 준우승을 이끌었으며, 국내외에서 그의 지도력을 높이 평가받았다.
위상과 후배에 대한 영향
선동렬은 은퇴 후에도 KT 위즈, LG 트윈스 코치로 활약하며 ‘제구 교과서’를 후배들에게 전수했다. 그의 ‘볼 배합 노트’는 프로 구단뿐 아니라 대학, 고교 야구부에서도 필독 지침서로 활용되고 있다.
최동원: 완투의 화신, 부산 사직의 전설
출생과 야구 입문
최동원은 1958년 5월 24일 부산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운동신경이 뛰어났으며, 중학교 시절에는 축구와 야구를 병행할 만큼 다방면에 소질을 보였다. 동래상고 재학 시절에는 투수로 전향하여 매회 최고 130km대 후반의 빠른 공을 던지며 주목받았다.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것은 3학년 여름 대회 결승전. 후반부에 등판해 9회 말까지 완투하며 우승을 이끌었고, 이 경기를 통해 그는 프로 스카우트들의 레이더망에 단번에 포착되었다.
롯데 자이언츠 데뷔와 신인 시절
1983년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한 뒤, 최동원은 곧바로 선발 로테이션에 이름을 올렸다. 루키 시즌부터 23경기에 등판해 12승 4패, 평균자책점 2.85를 기록하며 신인왕급 성적을 거두었다. 무엇보다도 그의 등판 일정은 롯데 구단의 체력 관리 기준을 바꿀 정도로 혹독했다. 감독은 “동원이는 7일 휴식도 필요 없다”고 말할 정도로, 팀 내에서는 그를 ‘무쇠 팔’이라 불렀다.
1984년 – 진정한 전성기의 서막
1984년은 최동원 개인뿐 아니라 롯데 자이언츠에게도 기념비적인 해였다. 그는 34경기에 선발 등판해 20승(1패)을 따냈고, 284.2이닝을 책임지며 평균자책점 2.40, 탈삼진 223개의 성적으로 투수 4대 타이틀(다승·탈삼진·평균자책점·승률 왕)을 휩쓸었다. 특히 그해 한국시리즈에서는 삼성 라이온즈를 상대로 7경기 중 네 번 선발 완투해 모두 승리투수가 되었고, 1세이브를 추가해 시리즈 MVP에 올랐다. 이때 그가 기록한 40이닝 완투 성적은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는 한국시리즈 최고 기록으로 남아 있다.
투구 메커니즘과 구종
최동원의 주무기는 140km대 중반의 직구와, 포크볼 및 슬라이더의 삼종 세트였다. 직구는 우타자 바깥쪽 코스로 꾸준히 유지되었고, 포크볼은 그 아래에서 급격히 떨어지며 헛스윙을 유도했다. 그는 투수판을 밟는 순간부터 공을 방출하는 타이밍까지 모든 동작을 일관되게 유지해, 타자가 구종을 예측할 수 없도록 했다. 특히 힘을 빼고 던지는 포크볼의 제구력은 동시대 어떤 투수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클러치 상황과 승부 근성
최동원은 연장 접전이 펼쳐질 때 집중력이 극대화되는 유형이었다. 1985년 개막 직후 연장 12회 말 등판해 무실점 완투승을 거둔 경기가 대표적 사례다. 팀 동료들은 그를 “가장 힘든 순간에 더 빛나는 투수”라 칭했으며, 팬들은 그의 등판 여부만으로도 직관 매진을 확신했다. 이러한 승부 근성은 ‘마운드의 철인’이라는 별명을 낳았다.
팀에 대한 기여와 리더십
롯데의 전성기에 최동원은 선발진의 중추로서 뿐만 아니라, 후배 투수들의 멘토 역할도 수행했다. 구단 내 투수 육성 시스템이 아직 미흡하던 시절, 그는 본인의 훈련 비법과 멘탈 관리법을 자발적으로 공유하며, 다음 세대 투수들의 안정적 성장에 크게 기여했다.
은퇴 후 야구계 공헌
1990년대 초 삼성 라이온즈로 이적해 짧은 기간을 더뛴 뒤 은퇴한 그는, 코치와 해설위원, 정치인으로서도 활동했다. 특히 해설위원 시절에는 투수 시점에서 경기를 읽어 내는 날카로운 해설로 시청자들의 공감을 자아냈다. 그가 남긴 기록과 ‘완투 정신’은 이후까지 한국 야구 투수들의 교본이 되었다.
양자 비교: 다른 길을 걸어간 두 거장의 발자취
투구 스타일
- 최동원: 압도적 이닝 소화와 구속 우위 기반의 힘 투구, ‘철인 모드’
- 선동렬: 각 구종의 제구 정밀도 극한 지향, ‘타이밍 봉쇄 마에스트로’
경쟁 환경
- 1980년대 초반 KBO: 아직 투·타 균형이 잡히지 않아 장시간 완투가 가능했던 시기 → 최동원에 유리
- 1990년대 초중반 KBO: 피칭 기법 다변화와 데이터 분석 초기 단계 → 선동렬이 제구 우위로 적응
기록과 업적
- 최동원: 103승, 평균자책점 2.46, 한국시리즈 4승 완투, MVP
- 선동렬: 146승, 평균자책점 2.16, 통산 탈삼진 1,698개, 투수 4관왕 3회
팬덤과 문화적 위치
- 최동원: 부산을 떠받드는 지역 영웅, ‘사직의 자존심’
- 선동렬: 호남권 전역의 지지, ‘제구의 대명사’
사회적 공헌
- 최동원: 야구 해설·정치 참여를 통해 대중에게 야구 철학 전파
- 선동렬: 국가대표 감독으로 국제 무대 성과, 코칭 시스템 혁신
이처럼 최동원과 선동렬은 ‘한국 프로야구 투수’라는 공통 분모 아래, 각기 다른 방식으로 경기를 지배하며 전설이 되었다. 한 사람은 강철 체력과 완투 정신으로, 다른 이는 섬세한 투구 운영과 제구력으로 각각의 영역을 구축했다. 두 거장의 발자취는 서로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독보적이며, 이들의 이야기는 한국 야구를 사랑하는 모두에게 ‘역대 최고의 투수상’을 놓고 누가 더 뛰어난지 토론을 멈출 수 없게 만든다.